이달의 책 137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달의 책 137 -아버지의 해방일지
  • 서영민 기자
  • 승인 2025.03.0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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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지음 장편소설, 주)창비 펴냄

반국가 세력,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 등등의 단어가 2024년 2025년에도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분단국가로 존재하는 이념논쟁의 폐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빨치산 아버지의 삶을 화자인 딸이 담담하게 되돌아보는 소설이다. 지난했던 아버지의 삶과 죽음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마주치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들. 우리 인간에게 이념이란 무엇일까?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이념은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이념을 신봉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12.3 계엄사태와 맞물려서 마음은 더 착잡해졌다.                          서영민 교육원 부원장 ymseo36@hanmail.net

다시 말하면 콩 심은 데 반드시 콩이 나는 것은 아닌 법이다.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피를 받고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어디까지는 현실주의자다. p11
►► 농부의 마음은 콩을 심으면 콩이 나야하지만 항상 변수는 존재한다. 발아되지 않는 콩에 문제일 수도 있고 새들이 쪼아 먹어서 새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다. 콩심은데 풀만 무성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도 그러 하건데 성장과정에서 무수한 변수들과 직면하는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기란 난해한 과제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바라보고 있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p42
►► 인간관계에서 방관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 소설의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뭔가를 관여하기에는 너무나 미안한 경우, 또 그 사람과 엮이고 싶은 생각이 일도 없은 작은 애정도 없는 경우, 내 상황이 누군가를 들여다 볼 여유가 없어서 만사가 귀찮은 경우 등등이 있을 것이다. 

가난하게 오래 살래, 돈은 많은데 일찍 죽을래, 신이 묻는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후자를 고를 터였다. p56
►► 나는 전자와 후자 중 어떤 걸 고를까? 오래 사는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과거의 기준으로 꽤 오래 살았기에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가 되어버렸다. ‘굵게 짧게, 가늘고 길게’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 p68
삶이 견디는 것이라면 또 견디는 사람이 최종적으로는 승리하는 것이라면, 사회변화는 더딜 것이다. 혁명은 견디지 않고 저항했기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되돌아보면 내 삶도 견디지 못한 때도 있었고, 잘 견뎌주었던 때도 있었다. 고통과 슬픔 분노의 강도가 달랐을 수도 있다. 내 스스로 잘 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끔 못 참을 때가 있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p98
►► 사후의 세계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관심 자체가 없다. 현실의 삶 자체가 너무 많은 변수들이 있고, 어느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지에 따라 휩쓸리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소심하게 시련의 바람이 거세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을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p102
►► 도움을 베푸는 사람의 도움 크기는 같을지라도 도움을 받는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도움 크기는 천차만별하게 달라진다. 어떠한 조직이나 사회도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평생을 놓고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도움을 받을 경우도 있었고, 도움을 준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이고 싶다. 그 도움이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긍정적이고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으면 더 큰 기쁨과 보람이 될 것이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p137
►► 인심의 점점들이 합류해서 만나는 민심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같고, 중력과 같은 것이어서 막아서기도 힘들고 거꾸로 흐르는 법이 없다. 리더는 민심의 흐름에 민감하고 방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p195
►► 스마트폰이 무수한 사진들을 기록한다. 문제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전의 시간들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언젠가 낡은 앨범들의 사진들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 사진들 속에는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내 나이의 아버지의 얼굴이 있다. 구순이 넘으신 어머니의 고운 중년의 기품이 있다. 안타깝지만 세월은 흘렀다.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p197
►►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든 감정은 미움도 아니었다. 미우면 외면하고 미워하면 된다. 견디기 힘든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이제 나는 질긴 마음들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 마음들을 붙들고 있는 시간들도 허망하기 때문이다. 남은 날들이 짧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들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 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p249
►► 사람들은 나를 몇 개의 얼굴로 기억할까? 나이가 들었음이라. 장례식장을 가는 빈도가 높아진다. 나의 장례식장 풍경은 어떨까? 부질없는 상상이다. 항상 누군가를 다 안다고 자신하지만 낯선 모습들을 만나면 당황한다. 때때로 나 자신도 낯설 때가 있는데 하물며 타인은 어떠하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p252
►►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시간은 흐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무엇이라도 하려고 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안타까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쏜살같이 시간이 흐르고 있기에 이것저것들을 시도해보고 도전해보는 것이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p11
►► 쉰을 훌쩍 넘어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나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당혹스러움은 4자가 5자로 바뀔 때보다 5자가 6자로 바뀔 때가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성장이 아니라 정리가 필요한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나만이 겪는 삶의 여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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