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듣다
그림을 듣다
  • 신은경
  • 승인 2024.12.2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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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외경-능소화
▲ 조외경-능소화

가을 오후, 호수 곳곳에 자리 잡은 낚시꾼들이 조용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주변에는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을 햇살처럼 지나갔다. 호수 앞 통창이 있는 까페에 음악이 흐르고 어느새 어두움이 내려앉으며 우리를 감쌌다. 전시회 콘서트가 시작된 참이었다.

5년 전 어느 저녁, 매운 쭈꾸미 볶음을 먹으며 그는 내게 말했다. “은경님과 콜라보하면 좋겠어요! 우리 꼭 같이 해요.” 그는 화가 J였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없었으니,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몰랐다. 그에겐 다른 직업이 있었고, 인문학 공부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음악과 그림의 콜라보라니 흥미로웠다. 보통 전시회에서 하듯 피아노를 그저 한두 곡 연주하고 싶진 않았다. 두 가지 장르가 만나 하나의 컨텐츠처럼 만들어져 사람들 마음에 행복 호르몬을 내뿜는 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그의 그림도 모르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난 그의 말에 헐겁게 맞장구쳤던 것 같다. 그렇게 말이 던져진 채, 몇 년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생계를 위해 분주하고 바빴다. 콜라보 얘기를 할 당시엔 보험을 했고, 요즘은 작은 국수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식당의 브레이크 타임과 일을 마친 늦은 밤에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하곤 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내가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강도 높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늘 그러듯 활기차고 들뜬 목소리로 전화했다. “일주일 뒤에 전시회가 있는데, 그곳이 문화복합공간이라 연주도 하는 곳이래요. 전시 오픈 때, 피아노 연주해줄 수 있어요? 다른 작가 세 명은 나의 수강생들인데...” 그의 이야기는 5년 전처럼 훅 들어와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과거에 어설픈 대답을 했던 것과 달리, 나는 확실하게 예스를 외쳤다. 나는 그의 전시회를 돕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몇 년간, 그의 생활에 살짝 접속한 나는 그의 열정과 삶의 생명력에 때때로 놀랐다. 그의 그림에 음악이라는 마법 가루를 뿌려서 그의 삶이 돋보이게 해주고 싶었다. 

그림과 음악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우선 그림들을 봐야 방법이 떠오를 것 같았다. 화가들의 그림을 모두 사진으로 보내달라 요청해서 뚫어지게 보았다. 같은 화가 J선생님에게 배웠지만, 수강생마다 그림체가 달랐다. 안정된 정물화, 휘몰아치는 추상화, 강렬한 색을 내뿜는 능소화, 평온한 바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 등등. 그림에서 받은 인상으로

▲ 권재욱-차유바다
▲ 권재욱-차유바다

피아노 작품을 선곡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행사의 사회자를 자청하여 화가들을 인터뷰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음악가인 나는 주의 깊게 듣는 것이 훈련된 사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시회에 온 관객들에게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스토리텔링 피아노 콘서트의 스토리는 나의 이야기가 아닌 그림의 이야기였다. 내가 원하던 콜라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연 당일, 처음 뵙는 화가들이 하나둘 도착했고, 나는 공연 전 그들에게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핸드폰 화면으로 보았을 때, 낙엽으로 보였던 것은 알록달록한 잉어이기도 했고, 단정하고 정적으로 보였던 그림은 피어오르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고, 아련하고 쓸쓸함을 주는 것 같은 그림은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덮치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내가 본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었다. 전시회 전에 회가들을 만나 그림에 대해 얘기했다면 다른 곡을 골랐을 수도 있었겠다. 나의 생각을 바꾸어 화가들의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해당 곡들을 재배치하고 바꾸었다. 전시회의 스토리텔링 콘서트의 주인공은 그림과 화가였고 나는 그들을 도와주는 피아니스트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 삶에서 보석을 발견하고 그림을 연결하여 화가를 최대한 빛나게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화가 한 분씩 무대로 초대해 살아온 여정과 그림이 삶의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듣고 작품 소개 후, 피아노 연주를 했다. 그들이 삶에 바쁘게 대처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시간이 남거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삶에서 숨이 턱턱 막힐 때,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세상의 일을 잊게 해주었던 것이 그림 그리는 작업이었다. 

▲ 조외경 - 너에게로 가는길
▲ 조외경 - 너에게로 가는길

세상의 안위를 위해 소방관, 경찰 등 험난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직업군이 있다. 그들은 매일 부정적인 에너지와 만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 앞에 늘 서 있는 이들이다. 거기엔 무거운 감정노동도 실려있었다. 그 에너지를 늦은 밤 술로 달래던 화가 K님은 붓을 잡으면서 이젠 음주 대신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붓의 끝에서 자신을 정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평화가 아닌 내면의 평화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화가 J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업 실패나 어머니의 병환 등의 열악한 가정환경도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대를 가기 위해 통장에 남은 150만원 전부를 가지고 미술학원을 찾아갔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유일무이한 미술학원비였다. 화가들의 열정적인 마음이 언어로 표현되면서 청중의 마음은 더욱 열렸다. 그 열린 마음에 피아노 음악이 스며들어 우리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다. 연주가 끝나자, 환하고 빛난 얼굴의 우리는 서로를 안아 온기를 나누었다. 

그림을 통해, 음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일까? 세상을 향해 뻗어있던 촉수를 거둬들여 자신과 만난 화가들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림 속에 있는 바다와 파도, 나무와 꽃, 눈과 사람 등은 내면 깊숙이 묻어놓은 사랑과 자유가 아닐까?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진심과 연결될 때, 나의 심장이 몽글몽글 따뜻해짐을 느낀다. 
사람을 들은 날,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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