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 ‘사소한 친절’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사소한 친절’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 신대욱
  • 승인 2024.12.2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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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은 사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너무 작아 하찮거나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는 것들이다.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것들도 사소하다. 그렇지만 어떤 사소한 말이나 행동은 일상을 흔들고 균열을 내며, 때론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주인공의 사소해 보이지만 큰 결심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98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일랜드의 소도시.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석탄 판매상으로 매일 고객들에게 석탄을 배달하며, 아내,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지역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 펄롱은 수녀원의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날 이후 빌 펄롱은 불면의 밤을 보낼 정도로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이 목도한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창을 넘어 밖으로 손을 내밀 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에 실제 존재했던 비극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됐던 막달레나 수녀원의 인권 유린 사건이다. 막달레나 수녀원은 미혼모를 위한 보호소이자 입양기관으로 운영된 복지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종교와 국가권력의 협력 아래 ‘타락한 여성’을 교화한다는 미명 아래 미혼모와 어린 소녀 등을 감금, 학대하고 기관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강제 노역을 시켜 수익을 편취해왔다. 더구나 여성들이 기관에서 출산한 아이들을 입양 보내 수익을 취하기도 했다. 70여년간 이어진 인권유린을 묵인하던 아일랜드 정부는 2013년에야 공식 사과에 나선 바 있고, 지금도 역사적 트라우마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역사적 상처를 한 개인의 경험과 연결시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와 연대의 정서를 전하고자 한다. 빌 펄롱은 가장의 무게에 짓눌린 소시민이다. 동이 트기 전 출근해 하루종일 무거운 석탄자루를 배달하고 집에 돌아오면 검게 변한 손을 깨끗이 솔로 문지른 뒤 식탁으로 향한다. 식탁에서 재잘거리는 딸들의 목소리에 하루를 마감한다. 이런 고단한 일상은 기계적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성당의 종소리와 소도시의 풍경, 주인공 빌 펄롱의 동선을 사소하게 들여다보면서 시작한다. 이어 특별한 대사 없이 꾹꾹 눌러 담듯이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시선을 닮은 화면이 이어진다.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세면대의 구정물은 고단한 일상의 반복을 알게 한다.
그런 빌 펄롱은 평소와 같이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수녀원에 끌려가는 어린 미혼모를 목격하게 된다. 또 수녀원에 석탄 청구서를 전달하러 수녀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바닥을 청소하던 소녀의 애원을 듣게 된다. 급기야 수녀원 석탄 창고에 갇힌 미혼모를 발견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 이후 빌 펄롱은 흔들린다. 성실한 가장이자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정직한 노동자인 빌 펄롱의 일상을 멈춰 세워 과거로 돌리는 사건인 셈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빌 펄롱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과거로 돌아간다. 그 역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겪었던 유년의 상처가 있다. 그의 엄마를 받아준 대저택에 사는 윌슨 부인의 선의도 떠올렸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는 아내와 딸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어떤 것으로 고를지, 석탄 배달 주문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게 전부였다. 안락한 삶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소시민에 불과했다. 그런 펄롱이 마주한 불의한 광경에서 영화는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수녀원의 참담한 진실을 폭로하기보다 이를 목격한 개인의 선택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사소함은 역설적이다. 창 안에만 머물다 밖을 향해 손을 내민 용기란 점에서다. 빌 펄롱의 행동은 그래서 사소하지 않다. 빌 펄롱은 비극적 상황을 목격한 이후 잠을 이루지 못하며 창밖으로 지나는 행인들을 바라본다. 과거를 떠올렸을 때도, 창 안에 머물며 밖에서 일어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암시하는 장면이다.
실제 “사고를 치는 아이들(수녀원에 갇힌)과 우리 아이들은 다르다”고 섣부른 행동에 나서지 말라고 경고하는 아내나 “수녀원과 부딪치면 당신 주변과 척지게 될 것”이라는 단골 펍 주인처럼 주변은 무력함으로 가득하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당대 아일랜드 사회 분위기에서 수녀원은 권력 그 자체기 때문이다.
펄롱은 고아가 된 자신을 보살핀 윌슨 부인을 떠올리며 행동에 나서게 된다. 미혼모였던 펄롱의 어머니를 받아준 이도 윌슨 부인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펄롱과 그의 엄마는 수녀원에서 마주친 소녀와 아기처럼 암담한 상황 속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우 표정과 몸짓으로 감정 변화 전달

영화는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원작자인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독자를 충격으로 끌어당기는 격렬한 감정이 거의 없다. 누르고 삼가고 줄이면서 쓰는 스타일의 작가다. 영화는 이런 원작의 분위기를 주인공인 빌 펄롱의 표정과 움직임으로 옮겨놓는데 집중한다. 빌 펄롱의 손과 발, 얼굴을 세밀하게 비추면서 그가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전한다. 빌 펄롱이 석탄가루가 묻은 손을 솔로 박박 문지르며 닦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표면적으로는 그저 닦아내는 행위일 뿐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지워내는 행위처럼 비친다. 그렇지만 다시 더러워진 손처럼 그가 목격한 상황은 지워지지 않고 다시 떠오른다. 본 것을 못 본 척하면 평생 잠 못 드는 밤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영화 후반부 빌 펄롱은 창을 넘어 밖을 향해 손을 내민다.
빌 펄롱의 행동은 윌슨 부인의 사소한 친절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그것들이 합해져 빌 펄롱의 삶을 이뤘기 때문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빌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는 과거의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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