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잊은 이들을 위한 따뜻한 시선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 갇혀 있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할 때 더욱 그렇다. 멀리 떠나와서 마주치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며 처음부터 재구성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과 <도망친 여자>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다. 거기서 삶을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도망침 속에서 잊고 있던 자신의 재능을 다시 깨닫는 과정을 그리며, <도망친 여자>는 주인공이 두 번의 예정된 만남과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을 소소하게 담고 있다.
두 영화 모두 시선을 마주하며 대화에 집중하는 여성들만의 관계 혹은 연대를 쌓는 과정이 중심을 이룬다. 반면 두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단정하며 떼를 쓰기 일쑤다. 심지어 <도망친 여자>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뒷모습으로만 나타났다 사라진다. 두 영화에서 도망치는 존재들은 대부분 남자들로 보인다. 그래서 두 영화 속 여자들의 도망침은 자신의 처지를 피하거나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맞서며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과정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어쩌다 남극, 나를 찾는 여정
<어디갔어, 버나뎃>은 뉴욕타임즈 84주 베스트셀러에 오른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한때 건축계의 최고 권위상 ‘맥아더상’ 최연소 수상으로 천재 건축가로 유명세를 탔으나, 지금은 이웃간 문제만 일으키는 사회성 제로인 인물로 전락했다. 남편 엘진(빌리 크루덥)은 IT기업에 다니는 워커홀릭이며, 성적이 우수한 딸 비(엠마 넬슨)는 기숙형 사립고교 진학을 앞두고 있다. 버나뎃은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온라인 비서 만줄라와 주로 소통한다. 딸 비와는 친구처럼 지낸다. 딸 비는 고교 입학 기념으로 남극으로 가족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러던 중 버나뎃은 국제 범죄에 휘말려 갑작스럽게 FBI 조사를 받게 되는데, 조사도중 사라진다.
버나뎃은 복잡한 인물이다.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 탓에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유지한다. 이웃과는 담을 쌓고 지내며 사사건건 부딪친다. 자신의 팬이라는 건축학도가 다가와도 뒷걸음친다. 그런 그에게 온라인 비서 만줄라는 물품 주문부터 비행기 예약, 일정 논의는 물론 하소연까지 들어주는 존재다. 그만큼 버나뎃은 한없이 외로운 존재로 나온다.
건축계를 떠나 가족에 집중한 시간은 20년이다. 그 사이 버나뎃은 불면과 우울에 시달리는 등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여기에 이웃과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남편은 원인을 모른다. 단지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고 정신과 치료를 위해 정신병동에 수용하려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많은 부분을 의지해왔던 온라인 비서 만줄라가 국제 범죄조직과 연결된 사실이 밝혀진다.
자신의 재능을 잊고 지내던 버나뎃은 옛 동료를 만나 다시 창작에 나서라는 조언을 듣는다. 예술가는 예술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위협이 된다는 조언이다. 버나뎃은 일련의 사건을 피해 남극으로 도망친다. 그 속에서 버나뎃은 다시 창작에 나서려는 의지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 중심을 뒀다. 건축계 옛 동료와 함께 엄마의 일을 응원하는 이가 딸 비다. 남편과 달리 딸은 이상 징후의 원인을 안다. 영화는 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엄마는 가족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자신을 잊은 것 같다는 딸의 내레이션은 영화의 주제를 압축한다. 사라진 엄마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이도 딸이다.
그런 점에서 <어디갔어, 버나뎃>은 개인의 능력을 희생당하면서 가정에 눌러앉게 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잊고 지내던 자신을 마주하며 자기 삶을 처음부터 다시 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영화다. 결국 멀리 떠나서야 자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 여성들의 이야기다.
남자 없는 여자들, 스스로 만드는 미래
<도망친 여자>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 감희(김민희)가 세 명의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 영화다. 만남이 예정된 두 명은 그들의 집을 방문한 가운데 소소한 대화가 이어지는 방식을 취했고, 세 번째 친구는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과정을 그린다. 하루를 묵거나 반나절 정도 머물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과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영화는 간결하면서도 느슨하게 일상을 비춘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감희는 만나는 사람마다 결혼 후 5년간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감희는 순서대로 만나는 영순(서영화)과 수영(송선미), 우진(김새벽)의 고민을 줄곧 듣는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보이나(그것이 고민이든 불만이든) 결국은 스스로 해결한다.
그들의 대화 사이 불청객처럼 끼어드는 남자들은 막무가내거나 떼를 쓰는가 하면, 위선을 떠는 존재들이다. 이런 남자들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여자들의 모습은 정면이다. 반면 남자들은 앞을 드러내지 못하고 뒷모습으로만 비칠 뿐이다.
<도망친 여자>는 이런 얼핏 놓치기 쉬운 ‘사이’들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흘러가는 대화 사이, 대화에 등장하지만 보여주지 않는 인물이나 소소한 에피소드들, 간혹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창밖의 산 같은 ‘사이’들 말이다. 풍경의 한 자락을 채우는 닭이나 새, 고양이 등도 무심하게 자리잡고 있다. 생략된 장면들로 유추하게 만든다.
세 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홀로 안정을 찾았거나 묵혔던 미안함을 떨쳐내며 이내 차분해진다. 감희는 이혼 후 안정을 찾은 영순과 필라테스 강사로 돈을 모아 삼청동으로 이전해 편안한 일상을 누리는 수영, 감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쳐낸 우진을 차례대로 만나면서 새로운 길을 나설 수 있는 공감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감희 역시 도망친 듯 보이지만, 그런 공감을 통해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듯 보인다.
감희는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우진과 헤어지고 길을 나서다 불현 듯 다시 극장을 찾는다. 감희가 보는 영화는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지는 장면(<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지막 장면)이다. 이 장면이 <도망친 여자>의 마지막 장면이다. 흐려졌다 또렷해지는, 가까이 다가왔다 밀려나가는 물결은 감희의 삶에 찾아올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신대욱
현 주간신문 CMN 편집국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