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끝내기 위한 북소리의 전율
노량 해전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최대 규모의 해전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조선 철병을 유언으로 남겼고,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왜군 장수들은 어떻게든 조선을 빠져나가려 한다. 특히 제1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 왜성에 고립돼 빠져나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이 해상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명나라 해군을 이끄는 진린에게 뇌물을 전하며 퇴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호소한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를 배경으로 퇴각하려는 왜군과 이들을 막아내 섬멸하려는 조명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를 그렸다.
임진왜란 최대 해전으로 ‘이순신 3부작’ 마무리
<노량: 죽음의 바다>는 <명량>, <한산: 용의 출현>을 잇는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명량>이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무찌르는 데서 오는 뜨거운 정서에 집중했다면, <한산: 용의 출현>은 거북선의 등장과 함께 학익진이라는 이순신의 전술을 차분하면서도 호쾌하게 풀어내는데 중점을 뒀다.
반면 <노량: 죽음의 바다>는 임진왜란 막바지, 조선과 명, 왜 삼국이 얽힌 구도는 물론 전쟁의 참혹상을 돌아보는데 상당 시간 할애한다. 무엇보다 이미 이긴 전쟁이니 더 이상의 희생 없이 퇴로를 열어주자는 명을 비롯한 주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왜의 완전한 항복과 섬멸을 주장하는 이순신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실제로 왜는 전쟁 패배에 따른 특별한 항복 의식 없이 권력 교체 이후(도쿠가와 막부) 화친 의사를 밝히는데 그쳤다. 이는 300여년 후 국권 찬탈로 이어진 역사가 증명한다. 임진왜란 당시 완전한 항복을 받아냈다면 똑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리란 점에서다.
본격적인 해전 시퀀스가 등장하기 전 1시간에 걸쳐 조선과 명, 왜를 오가며 당시 정세와 역학 관계를 살피는데 할애한 것도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불사한 전투(섬멸) 의지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설득하기 위해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명군은 조선에서 싸울 명분이 없어졌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 즉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이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시작됐다. 명은 조선이 위태롭자 자신을 노리는 왜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선에 원군을 파병했다. 명분이 사라진 것과 함께 남의 나라 전쟁에서 더 이상의 희생을 치를 필요가 없어진 것도 소극적으로 일관한 이유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왜도 자국의 권력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내전으로 치닫는 급박한 상황) 가급적 현재의 병력을 유지한 체 하루빨리 돌아가고자 한다. 제1 선봉장 고니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킬 의무가 있다. 현재 본국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는 상태다.
순천 왜성에 갇혀 있던 고니시는 조선에서 철병하라는 본국의 명령이 자신에게 가장 늦게 전달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도일 것이라며 불안해하며, 어떻게든 조선에서 빠르게 빠져나가려 한다. 그는 자신의 심복 아리마를 명 도독 진린에게 보내 퇴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한다. 진린은 이순신을 만나 이미 많은 전투에서 여러 업적을 세웠다고 추앙하며 이미 이긴 전쟁이니 굳이 퇴각하는 왜군과 싸워봤자 희생만 커질 뿐이라며 퇴로를 열어주자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광해군 측으로부터 광해를 시기하는 세력이 있으니 현 수군 병력을 최대한 유지해 광해를 도와야 한다는 서찰을 받는다. 이순신은 다들 전쟁 이후만 생각한다며 탄식한다.
왜의 완전한 항복과 섬멸이라는 이순신의 신념
이런 주변의 역학 관계 속에서도 이순신은 흔들리지 않고 적들을 섬멸하기 위한 전투 의지를 다진다. 어쩌면 노량 해전은 이전의 전투와 달리 무모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벌인 수많은 전투 중 노량만큼 많은 피해가 발생한 것은 처음이란 점에서다. 그만큼 7년간의 임진왜란 기간 벌어진 전투중 양측이 전력을 다해 맞붙은 최대의 전투였다는 방증이다. 노량은 조명 연합군 500여척의 함선과 왜군 함선 500여척이 충돌한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아군의 피해가 클 것이라고 명백하게 예상되는 전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공감하도록 영화는 이끌어간다.
김한민 감독은 전작들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인 아픔을 보여주는데 상당 부분 할애한다. 어머니가 전쟁 중 돌아가셨고, 셋째 아들 이면이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특히 셋째 아들이 왜군과 싸우다 죽는 악몽을 꾸는데, 이순신은 아들을 돕지 못한다. 또 수많은 병사와 백성들이 죽음에 내몰리는 참혹함도 겪었다. 이런 개인적인 복수만으로는 큰 피해가 예상되는 전투를 이끄는 동기가 되지 못한다. 영화에서도 나오듯 이순신은 전쟁을 일으킨 왜의 완전한 항복과 섬멸을 원했다. 열도 끝까지라도 가서 반드시 왜놈들의 항복을 받아내야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의지에서다. 두 번 다시 비극적인 침략전쟁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의지다.
100여분간 이어지는 해전 시퀀스는 압도적이지만 <명량>과 <한산> 등 전작들과 달리 승리의 쾌감을 전하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대신 전쟁의 참혹함에 집중한다. 임진왜란 전투중 유일한 야간전이었던 노량 해전은 밤부터 아침까지 이어졌다. <노량>은 전술 전개보다 육체적으로 맞붙는 백병전을 길게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전쟁의 허무함과 비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무엇보다 해상 시퀀스 후반부 이순신 장군의 환영인 듯한 장면은 이같은 비극성을 잘 보여준다. 이순신 장군은 이전 전투에서 전사한 부하 장수들의 환영을 보며 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환영에서 깨어나듯 이순신 장군은 북을 치고 병사들을 독려한다. 지친 병사와 장수들은 “장군께서 우리를 독려하고 계신다”며 마지막 남은 힘을 모은다.
이순신 장군은 총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면서 전투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잠시 멈췄던 북소리가 다시 들리며 결국 전투는 조명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자신의 목숨을 불사하고 왜의 완전한 항복과 섬멸 의지를 다진 이순신 장군의 신념은 길게 울리는 북소리처럼 계속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