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추락의 해부
  • 신대욱
  • 승인 2024.03.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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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종말’ 들추는 법정 드라마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외딴 산 속에 있는 집에서 한 남자가 추락한다. 의학적 사인은 두부 외상이지만, 경찰은 사고 혹은 의도가 개입된 사망으로 결론을 유보한다. 남자가 추락한 시간에 집에 있던 유일한 사람은 아내 산드라다. 경찰의 결론 유보로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산드라가 용의자로 몰린다. 추락한 남자를 최초로 발견한 인물은 아들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최초 목격자로 주요 증인이 되지만 시각 장애로 인해 신빙성을 의심받는다. 경찰은 다각도로 검증에 나서지만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래도 심증만으로 법정으로 끌고 간다. 산드라는 남편이 자살했을 것이라는 정황을 제시하며 방어에 나서지만, 남편이 녹음한 파일이 공개되면서 궁지에 몰린다. 그 과정에서 두 부부의 신뢰가 이미 무너져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까발려진다.

물리적 추락, 감정의 몰락

영화 <추락의 해부>는 지난해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수작이다. 서사는 단순하다. 남편이 추락사한 원인을 찾아가는 법정 드라마로 이뤄졌다는 점에서다. 겉으로는 법정 공방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서사로 보인다. 그렇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자살인지 타살인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법정 공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산드라와 사무엘 두 부부의 관계가 어떻게 균열로 이어지게 됐나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간 관계가 어떻게 폭력적으로 의심의 세계 아래 놓이는지 살핀다.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 알고 보니 얼마나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어두운 화면으로 시작한다. 어두운 가운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이 알고 싶나요?” 그리고 화면이 밝아지면 계단이 보이고 공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떨어진다. 이어 개가 그 공을 따라 뛰어내려온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당신이 설명하는 방식, 아들의 사고...” 상대방 여자의 목소리도 바로 나온다. “경험을 통해서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대화가 이어질 때, 물을 트는 사람의 손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군가 개를 목욕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대화는 생략된 상태로 연결된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관심입니다.” “무엇에 관해 쓰실 계획입니까?” 이때 이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음악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 음악으로 인해 이들의 대화는 다음으로 미뤄진다.
<추락의 해부> 도입부다. 이 오프닝에 이 영화를 보는 힌트가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대화의 주인공은 사무엘의 아내 산드라와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대학원생이다. 개를 목욕시키는 이는 산드라의 11살 아들 다니엘이다. 대화를 방해하려는 음악을 튼 이는 남편 사무엘이다. 아내 산드라는 성공한 유명 작가다. 이 도입부는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단란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중‧후반부를 본 다음 다시 도입부를 떠올린다면, 불안하고 위태로운 장면이었단 것을 깨닫게 된다. 관계의 균열을 파편처럼 제시한 셈이다.
영화 도입부를 지나면 본격적인 법정 드라마로 나아간다. 용의자로 몰린 아내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이어진다. 법정 공방이 진행되면서 영화 도입부에 흩어놓은 퍼즐이 하나씩 맞춰진다. 물론 이 영화는 추리극이 아니며, 관객과 머리싸움을 하는 퀴즈가 아니다. 진실을 찾아가는 법정드라마와 스릴러라는 장르를 충실히 따라가긴 하지만, 조금씩 장르를 비켜가며 영화를 보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든다.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관계의 복잡성

도입부의 어두운 화면은 아들 다니엘의 시점 숏이다. 법정 공방 중에 드러난 핵심적인 사실은 아들 다니엘의 사고다. 다니엘은 4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법정 공방 중에 드러나지만 이 사고는 남편이 제 때 다니엘을 데리러 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로 인해 남편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병원비 부담으로 런던에서 외딴 시골로 내려오게 됐다. 시력을 잃은 아들의 홈스쿨링도 자처하면서다. 이 사고 이후 부부의 관계는 서서히 균열에 이른다. 그러니까 시력을 잃은 아들 다니엘의 시점 숏(어두운 화면)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부부 관계가 균열된 출발점을 제시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무엇보다 다니엘이 법정 공방을 지켜보면서(들으면서) 자신으로 인해 가정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도 부각시키는 힌트다. 부부 사이 관계의 균열과 사건 이후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엄마와 아들의 상황을 동시에 보여주는 도입부다. 그만큼 영화는 사건의 진실보다 관계를 향한다.
<추락의 해부>의 추락은 중의적이다. 남편의 추락뿐만 아니라 가정의 추락, 개인의 위상 하락, 명예 실추, 신뢰가 떨어지고 감정이 허물어지는 요소들을 담았다는 점에서다. 영화는 남편의 물리적 추락을 증명하는 것으로 출발해 한 가정의 치부를 낱낱이 파헤치며 끝없는 나락으로 내몬다. 아들의 비극적 사고가 드러나고 부부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외도, 표절 등이 법정 위 증거로 나열되며 사회적으로 추락시킨다. 급기야 검사는 산드라의 소설 속 ‘죽이고 싶다’는 대사를 연결지어 살해 의도가 다분히 있는 것 아니냐고 추궁한다. 사건에서 벗어난 정황만으로 덫을 놓는다. 그렇게 산드라의 인생이 간추려지지만, 산드라는 섣불리 정의할 수 없는 관계의 복잡성을 길게 설명한다.
이런 와중에 아들 다니엘은 엄마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그럼에도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한다. 다니엘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고 믿음으로 판단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얘기한다. 결국 산드라는 긴 법정 공방 끝에 텅 빈 승리에 이른다. 어쩌면 법정을 통해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남편에 대한 회한이 몰려온다. 유예된 추모의 시간이다.
<추락의 해부>는 런닝타임이 2시간 30분에 이르지만 지루할 틈 없이 시종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표정으로 감정을 깊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다. 청각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를 충돌시키는 플래시백 기법도 새로운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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