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신대욱
  • 승인 2024.04.23 15: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상류에서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하류에 영향을 미친다. 자연의 규칙이지만, 이는 인간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차세대 거장으로 떠오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개발주의와 자연을 지키려는 이들의 충돌을 다룬 생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를 넘어선다. 상류에 거주하며 하류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들의 행동이 불러오는 재앙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이들의 처연함과 변화에 주목하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 종식 후 삶의 조건이나 사회 문제, 자연과 환경, 자본의 개입 등 다양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고, 이를 독특한 영화적인 기운으로 감싸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는 일본 외곽 산골마을에서 8살 딸 하나(니시카와 료)와 살고 있다. 타쿠미는 마을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다양한 허드렛일을 돕는다. 매일 나무를 패고, 샘물을 떠다 마을 우동집에 납품하며 생계를 꾸린다. 하나는 등하교길인 숲속을 매일 가로지르며 산벚나무, 낙엽송 따위의 나무 이름을 익힌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 마을에 글램핑 야영장 건설이 계획되고, 도시의 기획사 직원들이 설명회를 연다. 숲이 오염될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자 기획사 직원들은 마을 사정에 밝은 토박이 타쿠미를 회유하려 한다. 그러던 중 타쿠미의 딸 하나가 갑자기 사라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나무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누구의 시점인지 알 수 없게 처리됐다. 이 장면은 엔딩에서도 똑같이 이어진다. 오프닝이 낮을 배경으로 했다면 엔딩 장면은 밤이다. 누군가 앞으로 걸어가면서 바라보는 장면 같기도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은 시선처리가 모호하다. 어쩌면 자연의 시선일지 모른다. 아래에서 위를 보는 것처럼 연출됐지만, 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는 점이다. 이같은 시선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평화롭던 마을에 균열을 내는 것은 글램핑장 건설이라는 사건이다. 중간 중간 들리는 사슴 사냥꾼들의 총소리도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사운드 효과다. 글램핑장 건설을 추진하는 이들은 전문 건설사가 아닌 연예기획사로, 회사 두 달 매출과 맞먹는 코로나19 보조금을 타기 위해 프로젝트를 급조했다. 이같은 속셈은 마을 주민들에게도 뻔히 보일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다. 마을 주민들은 정화조 위치 변경이나 24시간 관리 체계 등 세세한 사항들을 지적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마을 회장은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준다. 상류에 사는 사람에겐 의무가 있다.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해 더러운 물을 전부 하류에 흘려보내서는 안된다.”고 일갈한다.

특히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타쿠미는 글램핑장 장소는 사슴이 다니는 길이어서 안 된다고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가야 하냐고. 그러면서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고 말한다. 사슴은 엔딩의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지게 하는 연결 고리기도 하다. 마을 회장의 말과 타쿠미의 말은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그것은 균형이다.
연예기획사 직원인 타카하시(고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의 입장 변화도 눈에 띄는 장면이다. 이들은 설명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 자신들이 전문적이지 않은 일에 몰린 상황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한다. 회사 대표와 컨설턴트가 적당히 주민과 소통했다는 증거를 만들고 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라는 식으로만 대응하라는 것도 불만이다. 이들은 타쿠미를 회유하기 위해 다시 방문하는데, 아예 마을 생활을 체험하기로 한다. 급기야 기획사 직원 타카하시는 장작 패는 체험을 하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며 도시와 회사에서 벗어난 삶을 꿈꾸게 된다. 이들은 타쿠미와 우동을 먹고 샘물을 뜨는 일을 도우며 돌아오는 길에 사슴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사슴이 사람들을 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유즈미에게 타쿠미는 사슴은 총에 맞았거나 새끼를 지키고 있을 때만 위험하지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대화는 영화의 결말을 암시한다.
그러는 사이 타쿠미의 딸 하나가 사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를 찾으러 나선다. 사라진 딸은 타쿠미가 발견한다. 하나는 총을 맞고 피흘리는 사슴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다. 기획사 직원 타카하시도 타쿠미와 함께 있다. 순간 타쿠미는 갑자기 타카하시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장면이 바뀌면 사슴은 사라지고 딸 하나가 쓰려져 있다. 타쿠미는 딸을 안고 숲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팬데믹 이후 인간과 자연의 공존 모색

영화의 결말은 급작스럽다. 타카하시가 기절했는지 숨을 거뒀는지, 쓰러진 딸 하나는 살아있는지, 피 흘리던 사슴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든 게 모호하다. 또 타쿠미의 행동은 옳았는지부터 이 장면은 타쿠미의 상상이나 꿈이었을지, 아니면 하나의 꿈일지에 이르기까지 의문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혹은 사슴과 하나, 타쿠미가 중첩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타쿠미가 사슴은 총에 맞았거나 새끼를 지키고 있을 때만 위험하다고 한 말이 실현된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는 타쿠미의 말에서도 결말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자본과 인간의 탐욕에 의해 위태로워진 자연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타쿠미의 행동이란 해석이다. 또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사슴은 갈 곳을 잃는데, 이를 막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자연의 영역이다. 영화가 시종 인간의 시점이 아닌 자연의 시점에서 바라본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 제목의 악도 그런 점에서 자연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고, 인간은 이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타쿠미가 딸을 안고 움직이는 방향도 의미가 있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은 왔던 길이 아닌 숲 쪽으로 향하고 있다. 어두운 숲의 하늘을 보며 숨가쁘게 움직이는 소리로 영화는 끝이 난다. 왔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균형의 추는 보다 자연에 가까워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인 듯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드라이브 마이 카>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콘서트를 위한 영상으로 기획됐다가 극영화로 발전됐다. 그만큼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콘서트를 위한 원래 의도된 영상도 따로 편집돼 <Gift>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123 미용회관 5층
  • 대표전화 : 02-585-3351~3
  • 팩스 : 02-588-5012, 525-1637
  • 명칭 : 대한미용사회중앙회
  • 제호 : BeautyM (미용회보)
  • 대한미용사회중앙회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한미용사회중앙회.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