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의 거장, 세상을 변화시키다
낸 골딘은 사진예술계의 거장이다. 80년대 전설적인 슬라이드 사진 전시인 <성적 의존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와 <디 아더 사이드(The Other Side)> 등을 통해 자신과 주변 친구들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주목받았다. 무엇보다 동성애와 드랙퀸, 트랜스젠더 등 소수자 공동체를 전면에 담으면서 당대 주류 문화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낸 골딘은 특히 여성에게 가하는 남성의 권력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고, 그 권력이 사회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이르기까지 살폈다. 낸 골딘의 작품이 정치적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대형 제약사에 맞선 투쟁 과정 생생히 묘사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낸 골딘이 사진작가가 되는 출발점부터 사회운동가로서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차로 보여주며 한 인물의 역사를 탐사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에드워드 스노든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티즌포>로 주목받은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은 낸 골딘이 주도하고 있는 P.A.I.N(Prescription Addiction Immediately Now, 처방 중독 즉각 개입)이라는 단체의 투쟁에 주목한다. P.A.I.N은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 중독 피해자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로 옥시콘틴을 개발, 유통하고 있는 거대 제약사 퍼듀 파마와 맞서 싸우고 있다. 영화는 이들 단체의 투쟁이 시작된 2017년부터 4년에 이르는 과정을 한 축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단체의 중심인물인 낸 골딘이 왜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됐는지를 추적하며 그의 개인사를 다른 한 축으로 병치하고 있다.
낸 골딘은 2014년 손 수술을 받은 후 진통제로 오피오이드 계열 약품인 옥시콘틴을 처방받았다. 옥시콘틴은 당시 안전한 진통제로 홍보됐으나,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로 중독은 물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사례가 빈번했다. 낸 골딘도 옥시콘틴에 순식간에 중독됐고, 죽음의 문턱에 이를 만큼 고통받았다. 3년에 걸친 악전고투 끝에 겨우 중독에서 벗어난 낸 골딘은 이런 고통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됐고, 이 문제의 근원이 옥시콘틴을 개발한 제약사인 퍼듀 파마와 그 회사의 소유주인 새클러 가문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새클러 가문은 중독성 있는 마약성 진통제를 무해한 약이라고 소비자를 기만해 돈방석에 앉았다. 1996년 옥시콘틴을 첫 출시한 이후 20년 만에 벌어들인 금액만 350억 달러(약 47조원)에 달한다.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 유력 미술관과 박물관, 대학을 후원하면서 사회적 기업이라는 이미지 세탁에 성공한 것은 물론 전 세계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영화 도입부는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2018년 3월 10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낸 골딘과 P.A.I.N 회원들이 조용히 입장한다. 이들은 이 곳의 가장 인기 있는 장소인 덴두르 신전 앞에서 “10만명이 죽었다.”, “새클러는 거짓말쟁이”, “돈의 사원, 탐욕의 사원, 옥시콘틴의 사원” 등을 외친다. 이들의 외침 사이로 이 전시관의 기증자 이름인 ‘새클러관’이 보인다.
새클러 가문의 이름이 내걸린 유력 미술관과 박물관, 대학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만이 아니다. 구겐하임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대영 박물관, 하버드 대학교 등을 망라하고 있다. 영화는 낸 골딘과 P.A.I.N 회원들이 이들 미술관과 박물관, 대학 등을 돌며 이들 기관에 ‘피 묻은’ 자선기금을 거부할 것을 끈질기게 압박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낸 골딘, 삶 자체가 예술이자 투쟁의 역사
그러면서 이 지난한 투쟁의 중심인물인 낸 골딘에 카메라를 집중한다. 새클러 가문을 향한 투쟁의 경과와 성과 사이에 낸 골딘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목소리와 낸 골딘의 사진 작업을 병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낸 골딘의 개인사와 현재 시점의 투쟁이 연결돼 있다는 암시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낸 골딘의 전기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낸 골딘이 자신의 언니가 죽음에 이른 과정을 담담하게 진술하는 장면이 나온다. 낸 골딘의 목소리와 사진 작업, 과거 가족사진, 영상 자료 등이 어우러지면서 울림을 준다. 그녀의 언니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지망생이었지만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부모와 불화, 격리 등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자살한다. 당시 11세에 불과했던 낸 골딘이 받은 충격도 컸다. 당시 잠재적인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된 낸 골딘도 시설에 격리됐다 가출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16세에 ‘자유로운 히피 학교’로 불리던 링컨시 사티아 커뮤니티 스쿨에 입학하면서 안정을 찾는다. 이때 처음으로 사진을 접한 낸 골딘은 비로소 자신만의 언어를 갖게 됐다고 말한다.
낸 골딘은 이후 사진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한 70년대 말부터 퀴어 커뮤니티와 에로티시즘, 에이즈와 약물 중독에 빠진 자신의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당시 예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정치적 검열과 사회적 편견이 거센 당시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낸 골딘은 이번 다큐에서 “사진은 반짝 스치는 희열이자 내 목소리였다”며 “작품을 공개하기 시작하자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이건 사진도 아니다, 누가 자기 일상을 찍어? 라는 반발이었다. 특히 남성 작가들과 갤러리스트들이 그랬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찍진 않았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만큼 낸 골딘의 작업은 출발부터 투쟁의 역사라 불려도 무방할 터이다.
영화가 주목한 것도 낸 골딘의 이같은 개인사로부터 비롯됐을 것 같다. 현재의 투쟁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삶 자체가 예술이자 투쟁이었을 것이란 인식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언니의 죽음을 회고하는 장면에 이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투쟁을 병치했고, 낸 골딘이 ‘가족’이라 부른 퀴어 커뮤니티 회고담 뒤에 새클러 가문을 향한 투쟁의 성과가 나타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방식을 취했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삶을 형성한다는 인식이다.
영화 원제이기도 한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all the beauty and the bloodshed)’는 언니의 정신과 처방기록에서 가져온 것이다. 낸 골딘 언니의 주치의는 언니의 상태에 대해 “그녀는 미래와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를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낸 골딘이 예술가로서 출발하는 계기가 언니의 죽음에서 비롯됐다는 것과 연결되는 문장이다. 아름다움을 향할 때 혹은 세상 밖으로 나올 때 거칠 수밖에 없는 ‘유혈사태’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쓰러져가는 수많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이런 ‘유혈 사태’는 언니를 자살로 몰아넣은 편견과 혐오부터 낸 골딘 스스로 ‘가족’이라고 부른 퀴어 커뮤니티 친구들의 죽음, 현재의 옥시콘틴 중독 피해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있다. 낸 골딘은 자신이 쌓아온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이같은 ‘유혈사태’를 지나치지 않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새클러 가문의 기부금을 받지 말라는 낸 골딘과 동료들의 압박에 미동도 하지 않던 주요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전시 취소까지 내걸며 압박하는 낸 골딘의 대응에 하나둘 새클러 가문의 기부금을 거절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전시관에 붙어있던 새클러의 이름을 지우는데 성공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유혈사태’를 지나치지 않았던 낸 골딘이라는 예술계 거장이 일으킨 변화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202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로는 사상 두 번째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전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35개가 넘은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