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킬러스 - 4인 4색 옴니버스, 느와르의 향연
더 킬러스 - 4인 4색 옴니버스, 느와르의 향연
  • 신대욱
  • 승인 2024.12.2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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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의문의 식당 혹은 바에는 사연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등에 칼이 꽂힌 채 눈을 뜬 남자가 바텐더와 대화를 나눈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시하며 살인을 의뢰하는 여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 순간 정적을 깨고 한 사람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이야기는 시작한다.

헤밍웨이 단편 <살인자들> 재해석

<더 킬러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살인자들(The Killers)>을 모티브로 한 옴니버스 영화다. 김종관, 노덕, 장항준, 이명세 등 4명의 감독이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시선으로 ‘킬러’를 재해석, 각기 다른 4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었고 이를 한데 묶었다. 각자의 개성을 살린 독자적인 느와르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공통된 모티브는 헤밍웨이의 소설 <살인자들>과 함께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이다. 그리고 배우 심은경이 4편의 영화에 각기 다른 색채로 등장한다.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은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 미국 일리노이주 서밋의 한 식당을 배경으로 타깃을 기다리는 살인 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대단한 일을 벌일 것처럼 겁박하지만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가 얼개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시대의 불안과 당대 사회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로버트 시오드맥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돈 시겔 등의 감독이 영화로 만들 정도로 여백이 많은 소설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등을 지고 앉은 한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고립감과 소외감을 드러내고 있는 빼어난 그림이다. 도시의 밤 한 식당에 홀로 앉은 인물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고, 바텐더를 바라보며 서로 대화하고 있는 커플은 어떤 관계인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더 킬러스>를 주도한 이명세 감독은 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발생한 불안과 뭔지 알 수 없는 상태, 그 속에서 뭔가를 기다리는 상황을 영화로 풀어가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 여러 감독과 옴니버스 단편 형식으로 기획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각각의 영화가 별개의 이야기로 흘러가지만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모티브를 통해 크게 한 편의 영화로도 보였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더 킬러스>는 그만큼 다채롭다.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김종관 감독의 <변신>, 유머러스하며 재기발랄한 노덕 감독의 <업자들>, 서스펜스 연출에 공을 들인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감각적인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장점을 살린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까지 각기 다른 감성과 감각으로 느와르의 향연을 펼친다.
<변신>은 흡혈에 의한 각성과 괴력이 발현되는 과정을 그렸다. 누군가에게 쫓기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등에 칼이 꽂힌 채 의문의 바에 들어선다. 그는 묘한 분위기의 뱀파이어 바텐더가 건넨 칵테일을 마시고 괴이한 힘을 얻게 된다. 주로

감성 멜로를 연출해온 김종관 감독의 새로운 장르 도전이다. 괴력을 지니게 된 육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피해자였던 사람이 공격자로 변화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제목처럼 변신 자체가 이 영화의 위트다.
<업자들>은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청부살인으로 빗대 유쾌하게 풀어낸다. ‘원청’이 약속한 청부 살인의 대가는 3억원. 그러나 하청에 재하청을 거치면서 대가는 30만원까지 줄어든다. 그럼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청부는 진행된다. 금액만 쪼그라든 게 아니다. 일을 후려친 만큼 정확한 타깃에서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마지막 살인청부 실행에 나서는 동네 똘마니 3인조중 이명세 감독의 아들(이반석)이 깜짝 출연한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특급 살인마로 불리는 염상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얽히며 벌어지는 활극이다. 통금이 내려진 밤, 쇠락한 어촌의 선술집에 염상구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렇지만 염상구를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에 대한 단서는 왼쪽 어깨에 새겨진 수선화 문신 하나 뿐이다. 코믹함과 장르적 쾌감에 후반부 반전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시대 배경이 1979년 10월 26일이다. 원작 소설의 배경인 미국 금주법 시대가 한국의 군사독재 시대로 연결돼 색다른 분위기를 전한다.
<무성영화>는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 시대를 반영한 알레고리도 가득하다. 범법자와 도시 난민, 추방자들이 모여 사는 지하 세계, 디아스포라 시티가 배경이다. 두 명의 킬러가 이곳을 찾는다. 이들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메뉴를 시킨다는 타깃을 찾아 식당에 들어선다. 이들은 정작 이곳에서 예기치 못한 낯선 이들과 난장을 벌인다. 무엇보다 영화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 다시 말해 극장 상영 영화가 축소되고 있는 시대에 맞서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이미지와 사운드로 가득 채워 영화적인 것을 되살리려는 시도다. 이미지만 존재하던 초기 영화에 대한 헌사와도 같다. ‘무성영화’를 빗대 현 시대의 말할 수 없는 상태, 그로 인한 답답함과 불안함도 전하고 있다.

배우 심은경, 4편을 잇는 페르소나

영화 <더 킬러스>는 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인다면 그들은 누구이고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에서 출발한 영화다. 헤밍웨이의 원작이 그렇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기본 모티브로 개성있는 4명의 감독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색을 입혀 4인 4색의 영화를 완성했다. 이들이 ‘킬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야기와 이미지, 사운드는 어떤 결로 이뤄졌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4편의 영화를 이어주는 큰 줄기는 배우 심은경이다. 심은경을 페르소나로 삼은 감독들의 해석을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심은경은 <변신>과 <무성영화>에서 바텐더로, <업자들>에서는 청부살인 타깃으로 오해돼 납치된 인질로 나왔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에서는 영화 초반부 잡지 표지 모델로 등장하며 전체 영화를 하나로 잇는 역할을 한다. 
<변신>에서는 매혹적인 비밀(뱀파이어)을 지닌 바텐더답게 표정을 하나로 읽을 수 없게 만들고, <무성영화>에서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자크 타티 등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코미디 감독의 대표 캐릭터가 어우러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업자들>에서도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때로는 딸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를 가진 엄마로 폭넓은 감정을 드러내며 관객을 설득한다. 그만큼 한 배우가 4편의 영화에서 다른 배우인 것처럼 전체 영화의 줄기를 잡는 역할을 했다. 단연 <더 킬러스>를 관통하는 주연 배우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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