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구나 죽는다. 그렇지만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고 살지는 않는다. 살아가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일 테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기 전까지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음을 미룰 수 없을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존엄한 죽음은 가능할까?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 <룸 넥스트 도어>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라는 사유를 유려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찬란한 삶이었듯 죽음도 존엄하게
유명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신간 출판 기념 사인회에서 오래전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가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간다. 마사는 유력 언론에서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로, 현재 수술로도 손쓸 도리가 없는 자궁경부암 3기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다. 두 사람은 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간 동안의 안부를 묻고 서로가 처한 현재의 문제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으면서 오랜 시간 단절된 우정의 공백을 메운다. 그렇게 여러 날의 만남이 이어지던 중, 마사는 존엄사를 결심하고 잉그리드에게 중요한 순간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영화 제목인 ‘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는 ‘옆방’이라는 의미다. 마사가 마지막 순간 옆방에 있어달라고 옛 친구인 잉그리드에게 부탁한 것에서 따왔다. 전장을 누비던 시절부터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행이 존재했다는 이유에서다. 두 사람은 과거엔 꽤 친했지만, 서로 연락하지 않은지 오래된 사이로 나온다. 잉그리드는 마사로부터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우린 안 보고 지낸 시절이 길었다”며 거절한다. 마사의 유일한 혈육인 딸에게 부탁해보라는 말도 전한다. 마사에게 딸은 없는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마사는 딸이 생긴 과정과 오해가 쌓인 일련의 사건들을 잉그리드에게 담담하게 전한다. 결국 잉그리드가 마사의 부탁을 승낙한 것은 혈육이나 절친 사이에서 나온 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신뢰 때문이다. 그래서 감내하기 어려운 과정을 꿋꿋하게 버틴 것인지도 모른다. 잉그리드가 마사의 부탁을 수락한 이후 두 사람은 뉴욕주 인근 별장으로 떠난다.
<룸 넥스트 도어>는 존엄사(안락사 또는 조력사로도 불린다)를 적극 옹호하는 영화다. 마사는 말기암 진단 후 실험 치료에 기대를 걸지만 실패로 끝나자 낙담한다. 마사는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얻으려 한다. 다크웹에서 안락사 약을 구하고 함께 할 친구를 찾다 잉그리드에게 부탁하게 된 것이다.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난 굴욕적인 고통 속에서 죽진 않을 거야.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라고 말한다. 존엄사는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 일부 국가에서만 합법적으로 허용돼 있다. 실제 세계 영화사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은
2022년 스위스에서 존엄사를 선택해 삶을 마감했다. 의사에 의한 조력사가 금지된 프랑스를 떠나 조력사가 합법인 스위스를 선택한 것이다. 국내도 현재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이 발의돼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다.
<룸 넥스트 도어>의 배경인 뉴욕주는 존엄사가 불법이다. 그만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소재이지만, 영화는 스스로 끝내는 삶 또는 존엄하게 잘 죽을 권리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베니스영화제 수상 후 “우리 모두에겐 옆방이 있다. 결국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될 공간이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그 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비록 조금 불편한 방이라 할지라도.”라고 말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죽음을 지연시키려는 의도일지 모른다. 영화를 이끄는 것은 마사와 잉그리드의 대화다. 마사가 주로 이야기하며 잉드리드는 주로 듣는다. 마사는 과거의 비밀을 회상 형식으로 털어놓는다. 10대 시절 만났던 남자친구 프레드(알렉스 회그 안데르센)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미셀(틸다 스윈턴/1인 2역) 이야기도 꺼낸다. 프레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후 전쟁 PTSD를 심하게 앓으면서 피폐해진 상태다. 그래서 마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딸 미셀은 아버지 없이 자랐고, 종군기자였던 마사 역시 제대로 돌볼 수 없는 형편이어서 딸과 사이가 멀어지게 됐다. 또 보스니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이야기도 전한다. 죽음을 기다리며 무수한 죽음을 꺼내놓은 셈이다. 마사가 전한 에피소드는 어쩌면 숭고한 삶과도 연계된 듯 보인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타는 집에 뛰어든 남자 친구나,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장한 군인들에 대항한 보스니아 민간인, 그리고 소중한 이와 함께 하기 위해 위태로운 전쟁터에 남은 바그다드 사제들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여기에 마사와 잉그리드 공통의 연인이었던 데이미언(존 터투로)이 등장하는데, 잉그리드가 마사의 죽음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 인물이다. 데이미언은 기후 위기로 인류의 미래는 끝났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온 세상의 시인들이 기후위기에 대한 시를 써봤자 나무 한 그루도 구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비관론자이다. 그만큼 영화는 죽음과 종말에 대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눈이 내린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그렇지만 <룸 넥스트 도어>가 지향하는 것은 그럼에도 삶을 긍정하고 삶이 아름답다고 보는 관점이다. 아름다운 삶만큼이나 이 삶을 마무리할 때도 스스로 존엄하게 생을 끝낼 각자의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같은 태도는 무엇보다 색감에서 두드러진다. 마사와 잉그리드의 옷이나 가방, 메이크업은 물론 마사의 집을 장식하는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총천연색으로 가득하다. 삶이 얼마나 화려하고 빛나는지를 색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마사는 빛나는 노란 정장과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이후 마지막 결행에 나선다. 무력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나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다.
대화를 통해 풀어가는 틸다 스윈턴과 줄리언 무어 두 배우의 표정과 눈빛은 영화를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이다. 여기에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죽은 사람들>이나 에드워드 호퍼의 <태양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도 주요 소품으로 큰 역할을 한다. 호퍼의 그림은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물론 마사의 몸으로 직접 재현되며 큰 여운을 남긴다.
무엇보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에 나오는 문장은 세 번 인용되는데,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라는 문장인데, 영화 초반부 두 친구가 병실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마사의 목소리로, 숲 속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로, 마지막 마사가 떠난 후 마사의 딸 미셀이 찾아왔을 때는 잉그리드의 목소리로 변주된다. 마지막 변주된 내용은 “눈이 내린다. 네가 지쳐 누워있던 숲으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이다.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