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창조적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영화를 보고 음악회나 미술관을 가고 다른 이들의 건축물을 찾아가 보면서 그 이상을 만들겠다는, 그걸 초월하겠다는 용기를 갖게 된다. 늙어서 체력이 떨어지면 싸울 마음이 사라진다. 창조적 근육이 없어지면 용기가 사라진다. 똑같아도 매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매일 전투를 하는 것이다” - 건축가 안도 다다오
창조적 근육과 체력을 기르는 방식은 동일하다 용기를 갖기 위해 몸과 마음의 근육을 기르자는 이 말. 너무 솔깃하지 않은가?
끊임없이 도태된다는 불안증에 시달리며 사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각자의 업을 가지고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인 줄 알기에 제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이탈시키지 않기 위한 방도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책 ’회복탄력성‘의 저자 김주한 교수 역시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달리기 등 꾸준한 운동과 감사일기, 명상 등을 처방한다.
많은 이들은 본인만의 창조적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부러 쉼을 갖고 부러 마음을 충전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 건 살기 위한 생존의 법칙인 것이다.
천만 다행인건 서울은 한강과 더불어 공원과 미술관과 아름다운 건축물이 꽤나 많은 곳이다.
짬을 내 걷다 보면 다양한 예술적 공간을 마주하며 어느새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손기정 문화 도서관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빨간 벽돌 건물의 외관이 주는 편안함과 더불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계단식 공간은 내가 아무렇게나 신발을 던져놓고 기대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안방 같은 아늑함이 느껴진다.
샹들리에가 있는 앤틱한 곡선의 나무로 이어지는 책장 역시 영국의 한 시골 저택에 들어가 소파에 앉아 애프터눈 티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닌 내가 그 공간에 있음으로써 느껴지는 포만감에 발걸음이 향하는 곳. 그 안의 내 모습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_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막바지 전시에 맞춰 서둘러 간 그곳에서 우린 크게 놀랐다.
오픈 시간에 맞춰 족히 300명은 되어 보이는 인파가 긴 줄을 늘어서 있었다.
다들 이렇게나 창조적 근육을 고파하는 건가!!
이제 우리 민족의 문화의식은 김구 선생이 그토록 지향했던 것처럼 드높은 문화의 힘을 갖게 된 것인가? 정치만 빼고...
그날이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인 관계로 50% 할인 덕인지(?) 더 많은 인파가 몰렸음을 알게 됐지만 여튼 우리는 이렇게나 문화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증명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건너온 에곤 실레의 작품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더불어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혁명가적 정신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빈 분리파를 결성하며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전시 활동을 통해 순수예술을 넘어선 종합 예술을 꿈꿨다. 그간 내 의식 속 그는 반짝거리는 귀족 그림만 그린 분인 줄. 오해했다.
어느 시대에나 특별한 열정과 의식으로 한 획을 긋는 이들이 있어 인류는 발전한다.
비엔나 1900 특별전시와 별개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모두 무료인 전시들이 널려있었다. 특별전인 고려청자는 왜 이렇게 이쁘고 청자의 색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다양한 동물 모양의 아름다운 청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조상들의 손재주에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남산_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길을 산책하는 건 벚꽃 피는 계절과 낙엽 지는 계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계절 관계없이 서울 도심 속 정 가운데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숨골 같은 곳이다.
남산 성곽 길을 산책하다 지난 3월 1일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들렸다.
하얼빈 의거 115주기를 맞이해 안중근의사 기념관 입구에는 단지해 혈서로 쓴 대한 독립이 태극기가 안중근 의사 동상과 함께 맞이한다.
단지된 그의 왼손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지며 웅장해진다.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역시 강단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평생 아들의 뜻을 함께했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 패전하더라도 준비가 없다면 또다시 외국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 의병을 계속 일으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힘을 길러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공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더불어 혹 독립 전쟁이 패전하더라도 세계 각국의 공론을 모아 독립을 보장받을 희망이 있음을 짐작했다.
이에 국내 항일 계몽운동 전략의 한계점을 느끼고 의병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는데 이때 나이 29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던 때 안중근의 나이는 30세였다.
안중근은 사형당하기 전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 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들의 해안은 지금의 우리나라를 있게 했다.
힘없는 작은 조선이 독립국이 될 수 있었던 건 일본의 패전 이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갈아 넣은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