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상처받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인지 모른다. 이 소설의 발상이 재미있다. 지은이라는 주인공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인물로 메리골드 마음세탁소를 운영한다. 이 세탁소에서는 세탁과 동시에 마음에 상처를 지울 수 있는 신비한 곳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상처를 마음 세탁소에서 지우며 치유된다. 읽는 내내 소설의 단어와 문장이 심장에 콕콕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나 또한 마음 세탁소를 찾아가야 한다.
깜박 잠이 든 소녀는 울며 잠에서 깬다. 사랑하는 이들이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모두 떠나버리는 악몽을 꾸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자신만 남겨두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떠나가는 꿈이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p17
►►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혼자 남는 것이 인생이라고 혼자를 받아들이고 혼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만 마음은 공허해진다. 함께 있으면 힘들어하다가도 또 혼자가 되면 함께 했던 때를 그리워한다. 지랄 맞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다.
다시 태어날 때마다 동네는 달라져도 같은 구조의 집에서 살기에 낯설지 않다. 방 하나, 거실 한에 작은 부엌이 있는 단촐한 구조의 열 두 평짜리 집이다. 가구라고 해봤자 침대 하나, 자근 화장대 하나, 장롱 하나, 의자 하나,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오랜 세기 전에는 크고 화려하게 집을 꾸며보기도 했지만 혼자 사는 외로움이 더 커질 뿐이다. p27
►► 살아가는 물건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것들이 많다. 한 사람이 필요한 공간이 몇 평이나 될까? 부와 비례해서 공간에 대한 욕망으로 집은 커지고 커진 집에 채울 물건들은 늘어난다. 물건들이 집의 주인인지 내가 집의 주인인지는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만약에 말이야, 마음이 아프면 꺼내서 얼룩을 지우고 햇볕에 널어 잘 말리면 돼. 다음 날이면 깨끗하게 마른 마음으로 편안해질 거야.” p36
►► 마음을 세탁하는 세탁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꿀꿀한 마음도 한 없이 가라앉는 기분도 탈탈 털어 말려버렸으면 좋겠다.
“눈 떠지니까 뜨는 거고, 사니까 살아지는 거야. 넌 안 그래?” p45
►►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진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계속 눈을 감고 있는 죽음이라면 당사자에게는 행복한 죽음일 것이다. 지금 살아지는 건가? 살고 있는 건가?
마음의 얼룩을 지우고,
아픈 기억을 지워드려요.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구겨진 마음의 주름을 다려줄 수도,
얼룩을 빼줄 수도 있어요.
모든 얼룩 지워드립니다.
오세요. 마음 세탁소로.
-주인 백- p49
►► 마음 세탁소가 있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을 세탁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슬프고 아리던 기억들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서 그런 것인지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아픔을 세탁해야 한다는 사실마저도 떠오르기 싫다.
“어떤 아픈 기억은 지워져야만 살 수 있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아프지만 그 불행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기도 하지.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해.” p55
►►불행이 에너지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불행의 강을 건너고 나서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판단이다. 이미 건너 왔기 때문에 불행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막상 불행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보면 정상적인 판단이 작용하지 않는다. 무기력 하거나 사투를 벌이거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재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까. 말은 생각의 언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눈동자의 흔들림까지 막을 순 없다. p64
►► 눈동자를 보면서 판단할 때 잘못된 것들을 무섭게 믿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서 잘못된 것을 말하면서도 거짓을 말하면서도 광기처럼 눈에 확신이 가득 들어 차 있다.
“응, 숨이 잘 쉬어지면, 그 때 문제를 마주하며 살아가면 돼. 문제없는 인생은 없어.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극복해 나갈 뿐이야. 도망가고 해결하고 그런 게 극복이 아니고, 그 문제를 끝까지 피하지 않고 겪어내는 거. 그게 극복이야.” p69
►► 인생의 문제가 어디 도망간다고 도망가 지던가?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수렁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고 그냥 견디다 보면 살아지더라. 잘 사는 게 뭐 별건가? 때 되면 먹을 수 있고 가끔은 좋은 사람만나서 수다 떨고 먹고 마시고 잘 자고 개운하게 눈 뜨면 그만이다.
“그럼, 인간의 뇌는 아주 단순해. 뇌를 속이는 거지. 뇌는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한대. 가짜로 웃으면 행복한 줄 알고 좋아하는 거지. 뇌한테 농담을 하는 거야.” p85
►► 행복이라는 놈은 어쩔 때는 꼭 지나고 나서야 보인다는 것이다. 미리 미리 보여주고 알려주면 좋으련만. 삶의 경험이 많다고 행복이란 놈이 더 잘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웃을 일이 많아야 하는데. 아니 자꾸 웃다보면 행복해지겠지.
생을 10이라는 숫자로 표현한다면 즐거운 하루가 즐겁지 않은 아홉 날들을 견디게 한다. p115
►► 짧았던 행복한 순간이 몇 년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즐겁지도 즐겁지 않은 평범한 날들의 삶의 탄탄한 바닥을 다지고 즐거운 날들이나 즐겁지 않은 날들은 건물이 세워졌다가 부숴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평범한 날들을 감사해야지.
마음의 겨울을 지날 때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이 계절이 지나갈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 그것은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한다. 마음에 봄이 오고 때론 여름으로 불타고 그 뒤엔 서늘한 가을도 올 것이라는 희망이 사람을 살게 한다. 희망마저 없다면 우리는 이 삶을 어떻게 견뎌낼까. p157
►► 고문이라도 희망고문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몇 번의 봄이 내게 주어 졌을까?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이다. 이보다 좋은 날들은 없다. 힘든 지난날들을 다 헤쳐 나오지 않았는가? 좋은 일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멈추면 나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는가?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다. 서로에게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하지만 적당히 곁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인가? p181
►► 혼자라면 편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가 되면 외로움에 힘들어 한다. 마음이 간사한 것인지. 인간 본질이 그러한지 모를 일이다.
“맞습니다. 잘못 쓰면 다시 쓰면 된다는 걸 그동안 몰랐습니다. 답을 틀리면 영원히 틀린 답인 줄 알았어요. 인생에 정답이 영원히 하나인 줄만 알고 살았습니다. 종이가 구겨져도 괜찮고, 다시 써도 괜찮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p218
►► 저마다 인생에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인지했든 하지 않았든 누구에게나 빛나는 시절은 있었다. 다 각자의 지도를 그려 나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길이 중요하다고, 산이 중요하다고, 건물이 중요하다고, 강물이 중요하다고…. 정답은 없다. 그리기만 하면 된다.
어떤 영화에서 보았는데 세상엔 숨길 수 없는 게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재채기, 가난, 사랑, 마음 세탁소에 처음 온 날 해인의 눈에 지은이 차오르는 걸 보며 재하는 조금 염려스러웠다.
p250
►► 딱히 숨기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다. 점점 도인이 되어 가는 기분이다. 불경을 암송하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해탈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욕망이란 놈을 만나면 그러면 그렇지 하고 돌아선다.
마음 세탁소를 운영하며 지은이 깨달은 사실은, 오늘이야말로 가장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후회해도 어제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내을은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이니 오늘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받은 마법은 같은 선물이 바로 오늘 하루다. p269
►► 오늘이 선물인데 이 오늘을 내일을 위해 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 기쁜 날이 시작되었고 내일이면 또 기쁜 오늘 하루가 시작된다. 내 마음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삶이 단순해서 오늘을 마감하며 오늘을 기록할 뿐이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이고, 내 선택이 옳은 것이라 잘될 것이라 믿는다면 결국 그렇게 될 거야. 말하는 대로, 믿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댈 살아가는 능력이 이미 네 안에 있어. 그냥 의심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봐.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어봐.”
올린 손에 힘을 주어 둘의 어깨를 두 번 토닥이며 지은은 말을 잇는다.
“그리고 기억해. 신은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을 시련이라는 포장지로 싸서 준대. 오늘 힘든 일이 있다면 그건 선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엄청난 선물의 포장지를 벗기는 중일 수도 있다는 거지.” p270
►► 이렇게 사는 것은 맞은 것일까? 신비한 능력으로 딱 이렇게 하면 되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었으면 좋겠다. 뭐가 정답인지 아무리 붙들고 늘어져도 모르겠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산다고 박수 받는 것 같은데 되돌아서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
모르지 이런 잡다한 고민에 휩싸일 수 있는 상황이 행복이라고 우기면 또 어쩌겠는가? 살아 질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내가 지금 오늘 내린 결정이 최선이었다. 당연한 거지만 내 삶에 대한 직시와 좌표는 내 스스로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